보기 좋은 부자(父子)손님
written by 윤주교 바리스타
1.
바리스타 파라와 2인 근무하는 날. 눈이 많이 와서일까. 뜸한 발걸음에 앨리웨이 몰 전체가 차분하다.
점심 손님들도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더 이상 오는 걸음 없이 한적해진 시간. 파라도 식사 시간이 되어 떠나고 나 홀로 바를 지킨다. 다음 달 커피를 잠시 탐구할 생각으로 2월의 에티오피아 데메카 원두를 소분하는 순간, 남성 두 분이 매장으로 들어오셨다.
메뉴판을 마주하자마자 드립 커피 쪽에 집중하는 어린 손님. 고등학생 정도로 추정되는데, 싱글 오리진 라인업을 뚫어져라 보며 좌우로 움직이는 눈동자에서 신중함이 여실히 느껴진다.
- 나는 에티오피아.
- 어우야, 여기서 커피를 고르는 거야?
아버지로 보이는 남성분도 메뉴판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붉어진 피부, 하얗게 서린 안경이 두 사람이 눈길을 걸어왔다고 말해준다. 가만히 메뉴를 읽기 시작했지만, 열의 가득했던 어린 손님과는 다르게 어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안내가 필요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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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벨 14번 입력]
S4 HOT 1
S6 HO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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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섬세한 꽃향과 단맛이 좋은 에티오피아 다바예, 아버지는 망고와 오렌지를 떠오르게 하는 케냐 티리쿠. ‘아들 따라왔으니 안 마셔본 커피, 산미 강한 커피 한번 마셔보자.’ 케냐를 고르는 목소리에 마음의 소리가 묻어났다. 서슴없이 바 좌석 메인 브루잉 존에 자리 잡은 두 사람. 원두를 분쇄하는 나의 등 뒤로 네 개의 눈동자가 뚫어져라 나만 보고 있다는 것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2.
열렬한 눈빛의 손님들에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을까. 분쇄한 원두의 시향을 권하고 잠시 떨어져 천천히 물을 준비했다. 두 사람은 바꿔가며 향을 맡고 서로의 느낌을 나눴다.
- 뭔가 평소에 맡아보던 커피 향이 아닌데?
- 응, 뭔가 향긋해.
두 사람의 대화가 충분하다 느껴질 때, 다가가 천천히 추출을 준비한다.
- 향은 어떠셨어요?
나의 첫 질문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질문도 쏟아진다.
- 지금 이 향이 커피에서도 나나요?
- 에티오피아는 워시드인가요?
- 케냐는요?
부자 모두 궁금한 것 한가득, 흥미 한가득. 손님의 질문에 답하며 린싱을 시작하자 아들은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촬영 버튼을 누른다. 아버지 역시 내 답변을 들으면서도 시선은 드리퍼에 고정된다. 드립 커피는 처음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이왕 셋뿐인 시간, 내가 하는 행동에 설명을 붙여 추출하기로 한다. 린싱-블루밍-원푸어. 하나씩 차분히 정보를 곁들인다. 이어서 원두 카드를 건네자 말없이 정독하는 두 사람. 아들은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 열심히 검색하기도 한다.
- 아들이 커피 학원에 다니는데, 거기 선생님이 여기는 꼭 가보라고 했대요.
이 흥미 가득한 부자가 추운 눈길을 뚫고 우리에게 오게 된 이유를 알았다. 평일 오후. 아버지가 원래 쉬는 날인지 연차를 썼는지, 심심해서 따라왔는지 아들이 졸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순간 부자가 나란히 커피를 마시는 광경은 자체로 아름다워 한마디로 표현해내기 어렵다.
3.
어느덧 매장이 북적이고, 부자는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다른 손님의 음료를 준비하며 흘깃,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원두 카드와 핸드폰을 보며 대화 중이다. 커피 한 모금, 말 한마디의 반복. 두 사람에게 커피 한 잔은 부족해 보인다.
- 괜찮으시면 이 원두 향도 한번 맡아보시겠어요?”
- 이것들이랑은 전혀 다른데요?”
부자의 흥미를 돋우기엔 몰트 블렌드가 제격이겠다. 이전에 마신 두 잔과 전혀 다른, 구운 곡물을 연상시키는 커피다. 이번에도 역시 원두 카드를 건네자마자 바빠지는 눈동자, 이어지는 질의응답.
- 로부스타?는 뭐지?
- 로부스타는 말이야. 그, 커피가……
로부스타의 설명은 아들에게 맡겼다. 열심히 머릿속을 뒤져 설명을 이어가는 아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아버지. 나는 조용히 몰트를 나눠 두 사람 앞에 놓았다.
4.
두 사람은 매장을 나설 때까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에 들린 책은 끝내 펼쳐지지 않았다.
- 다음엔 아내랑 올게요. 잘 마셨습니다. 감사합니다.
30분 남짓한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시간이었다. 메뉴를 안내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익숙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책을 읽다 돌아갔을 수도 있다. 시향을 권하거나 질문에 잘 대답하지 않았다면, 나를 말 없이 지켜보다 조용히 잔을 비우는 두 사람을 상상해본다. 몰트 시음을 권하지 않았다면, 아들은 아버지에게 공부한 내용을 꺼내게 되었을까. 그저 가능성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오늘 이 부자의 시간 속에 나는 괜찮은 바리스타이지 않았을까. 항상 이럴 수 없겠지만, 언제든 그럴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