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블렌드 브랜딩 회고 블랙수트와 실수들
BB Letter #028 | 2021. 10.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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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 한 주 잘 보내셨나요? 저는 갑자기 날씨가 무섭게 추워지는 바람에 음악 페스티벌 예매를 취소했어요. 이 날씨에 6시간 넘게 바깥에 가만히 앉아있을 상상을 하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벌써부터 전기방석을 깔고 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한 달에 한 번 꼴로 브랜드 디렉터 DD가 레터에 이야기를 실어 보내고 있는데요. BB 팀이 일하는 방식, 브랜드 관련 의사결정을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비하인드 씬의 이야기들을 들어보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 DD는 우리를 BB의 대표블렌드 '블랙수트'의 시작점으로 데려갑니다. 그 중 하나는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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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수트 에피소드
성훈식 DD, 브랜드 디렉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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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원두카드 리뉴얼 프로젝트로 한창 바쁜 데릭이 저와 쿄쿄에게 과제를 던져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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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수트가 세상에 나온 지도 이제 8년이 되어가네요. 현재의 블랙수트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회사에 많은데, 블랙수트가 지나온 8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두 분 정도인 것 같아요. 두 분의 블랙수트 이야기 자유롭게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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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둘이 제일 고였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쿄쿄는 도망갔습니다) 블렌드에 대한 이야기 는 저번 뉴스레터에서 한참 동안 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그냥 블랙수트라는 제품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처음 런칭한 시점이 꽤 아득해서, 무슨 생각들을 했었는지 2014년의 노트들을 뒤적이며 추억에 잠깐 잠기기도 하구요. 그런데 떠오른 생각들이 공교롭게도 다 실수들이더라구요. 데릭이 자유롭게 적어도 된다고 했으니, 믿고 좀더 편하게 끄적여 보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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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수트는 저희 BB의 대표 블렌드로,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커피하우스를 대표하는) 하우스 블렌드, (브랜드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블렌드 등... 어쨌든 브랜드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이자 가장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이니, BB를 대표하는 제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2013년은 블렌드를 기획한 해이기도 하지만 BB가 런칭된 해이기도 합니다. 당시 저희의 첫 제품은 매월 서로 다른 3종류의 커피를 소개하는 커피구독 서비스였어요(지금 수많은 구독서비스들이 피어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좀 빨랐죠). 당시 서비스가 업계 내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기에, 저희는 구독박스가 아닌 다른 제품 라인업을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예컨대 BB 브랜드 안에서 블렌드를 만들어 B2B 사업을 전개해야겠다는 생각, 빈브라더스는 어디에 있냐는 문의를 꽤 받았기에 로스터리 겸 쇼룸을 열어 직접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커피를 내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생각이 흘러흘러 도달한 곳이 지금의 서울 합정 매장입니다) 등등. 이 두 가지의 생각이 합쳐져 블렌드를 만들게 됩니다.
블렌드 컨셉팅의 배경에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있었어요. 그중 대표적인 것들이,
- 한국 사람들이 가장 즐겨찾는 메뉴 2개인, 아메리카노와 라떼에 각각 최적화된 블렌드를 만들자.
- BB가 블랙&화이트의 톤앤매너를 가지고 있으니, 블렌드가 이 컬러감을 각각 하나씩 가져갈 수 있도록 하자.
(지금 와서 보니 참 생각이 단순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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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블랙수트. 이때는 유광이 왠지 반짝반짝하고 좋아보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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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온 블렌드들이 지금도 건재함을 과시하는 블랙수트와 벨벳화이트입니다. 블랙수트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만족스러운, 블렌드의 개념에 맞는 기본에 충실한 커피를 지향점으로 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클래식 이라는 키워드를 계속해서 블랙수트와 연관지어 생각하려고 했었는데요, 그래서 클래식함의 상징으로 수트를 네이밍, 제품 디자인 등에 반영했었습니다. 사실 속으로는 완전 뉴비 브랜드가 '시간을 초월해야 하는' 클래식과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는 약간의 고뇌? 번뇌?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클래식Classic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제품 브랜딩을 밀어붙였던 것 같네요. SUIT이라는 단어는 옷도 있지만 '딱 적합한'이라는 이미지가 연상되어 더욱 좋기도 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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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블랙수트 네이밍에는 당시 열심히 봤던 미드 <How I Met Your Mother>의 캐릭터 바니 스틴슨(배우 닐 패트릭 해리스)의 지분율이 15% 정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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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또 하나의 블렌드, 벨벳화이트는 초창기 밀크 베버리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을 모토로 했기에, 우유 스팀을 잘 했을 때의 표현인 '벨벳폼'에서 따왔습니다. 그래픽적으로는 하나가 수트였으니 다른 하나를 시각적으로 (벨벳)드레스로 표현했었어요. 기획할 당시에는 단순히 블랙수트가 남성적이고, 벨벳화이트가 여성적인 무드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후 많은 피드백을 받으며 흑백, 남녀 등의 이분법적 사고가 편협한 접근임을 깨닫고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지금 와서 다시 들추어봐도 참 부끄럽네요(특히 보편성을 생각한다면, 수트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잘 어울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리브랜딩 프로젝트 때 제품명 변경에 대한 논의도 진지하게 다루었었는데요. 이슈의 근본이 이름보다는 표현 방식에 있다고 보았기에 최종적으로는 네이밍은 그대로 가져가되, 고유 디자인 체계를 만들면서 블렌드가 추가되더라도 다양성을 지닐 수 있는 방향으로 패키지 디자인을 변경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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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블랙수트 패키지 디자인. 원두카드도 새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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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움 1. 이분법적 사고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사고합니다. 동시대에 맞는 성 역할과 젠더를 주의깊게 고려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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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카페쇼 2013에 참가한 빈브라더스 부스 출처 : aving.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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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데릭의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기억은 13년 가을의 카페쇼입니다. 브랜드를 처음 오프라인에 선보인 나름 성공적인(?) 자리였지만, 제게는 이 기간에 있었던 에피소드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는 시기입니다. 첫날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피곤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다음날을 준비하는데, 옆에서 루이보스가 전화를 받더니 표정이 어두워졌어요. 테일러커피 대표님으로부터 온 전화였는데, 알고보니 테일러커피의 블렌드 라인업이 각각 <퍼플레인>, <블랙수트>, <벨벳>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나는 블렌드명이 완전히 같았고, 다른 하나도 몹시 비슷했던 거죠. 이렇게 여러 이름이 겹치다 보니 테일러 대표님께서는 이름을 카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셨구요.
다음날 찾아가서 어떤 의도로 제품들을 만들게 되었는지 설명드리고 오해를 푸는 과정이 있었는데, 제게는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말씀을 나누어보니 브랜드도 제품도 저희보다 먼저 만드셨기에 충분히 오해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을 만든 것 자체에 대해 테일러커피 팀에게도 죄송스러웠고, 제품 브랜딩을 한 입장에서도 리서치를 충분히 하지 않아 발생한 기초적인 실수였으니 더욱 아찔했죠. 특히 브랜드가 옷을 재단하는 재단사Tailor를 모티브로 하기에 옷에서 나오는 워딩들인 수트, 벨벳 등을 차용하셨다고 말씀주셨을 때에는, 더 적절하고 좋은 접근이었다고 생각되어 몇 배로 죄송했습니다(대표님 그때 따뜻하게 이해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매장에는 여전히 종종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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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움 2. 작은 제품이더라도 런칭할 때에는 여러 명이 교차로 부단히 검증합니다. 시야를 업무 내로 좁게 놓지 말고 이웃, 업계, 사회 전반을 감각합니다(이건 1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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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이란 시간동안, 변한 것이 패키지뿐만은 아닐겁니다. 2013년의 블랙수트와 2021년의 블랙수트는 생두 재료로서도 완전히 상이합니다. 로스터리에서 임하는 방법론도 기술도 개선되고, 이를 재료로서 한 잔의 커피로 만들어내는 바리스타들의 장비도 기술도 많이 달라졌죠. 하지만 여전히 동일한 점이 있다면, 블랙수트는 BB가 선보이는 커피들의 기준점이라는 점일 겁니다. 저희가 싱글오리진을 내거나 프로젝트 블렌드를 개발할 때에도, '블랙수트보다 산미가 덜해야 해', '블랙수트보다 좀 더 가야 해' 등등의 대화들이 넘나듭니다. 볼륨으로 보면 더욱 더 생두의 구매부터 로스팅과 추출까지 회사의 전체적인 흐름이 블랙수트를 기준으로 움직이니, 블랙수트는 BB 고유의 리듬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클래식 이라는 키워드로 블랙수트를 기획했지만, 이렇게 8년여의 시간동안 리듬감있게 블렌드를 내어 보니 커피제품으로서 블랙수트는 음악적으로는 재즈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해진 악보가 있고 이를 정확히 맞추어 연주하기보다, 매일매일 수많은 팀원들이 함께 상황에 맞는 최선의 잼을 하는 느낌입니다. 약간의 스윙이 더해지고, 엇박(?)이 발견되는 것도 잼 세션과 유사하고, 그 순간에는 긴가민가한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아 그래도 우리 좀 늘었구나 하는 성취감이 있는 것도 비슷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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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의 리듬으로서 블랙수트를 생각하니, 이 곡이 생각나 공유해 봅니다. 그레고리 포터Gregory Porter의 <Liquid Spirit>이라는 곡인데요, 아침에 들어도 저녁에 들어도, 재즈 템포의 원곡으로도 bpm 121의 리믹스로도 서로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곡입니다. 아메리카노로도 라떼로도 훌륭한, 마치 블랙수트처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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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식 DD, director, co-founder
오전에는 플랫화이트를, 오후에는 드립커피를 마십니다. 저녁에는 못 마셨었는데, 훌륭한 디카페인 라인업이 생겨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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