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소이입니다. 오늘은 겨울에 어울리는 일상 속 커피 이야기를 전합니다. 음악가 이동열 님의 커피 이야기입니다.
동열님과는 한 달쯤 전 처음 알게 됐어요. 커피를 즐기며 글쓰는 음악가라니, 근사한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전화로 첫 인사를 나눴습니다. 차분하고 느린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우연에 열려있는 여유와 자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걸까요. 내년엔 악기를 배워볼까 하는 공상을 해봅니다.
동열님께 BB레터에 담을 글을 부탁드렸습니다. 커피와 관련된 이야기면 무엇이든 좋다고요. 몇 주 후 도착한 동열님의 커피 이야기는저를 여기저기로 데려갑니다. 겹치는 기억과, 새로운세계가 섞여있네요. 오늘 레터를 읽고 나서는 독자님의 <가장 사적인 커피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는 것 어떨까요?
Coffee x 3
written by 이동열, 음악가
1.
어릴 적 할머니는 두통이 있을 때마다 믹스 커피를 마시곤 했습니다. 두통약을 드실 것이지 왜 커피를 드실까 늘 의아했죠. 게다가 뜨거운 물에 녹으며 풍기는 달콤 고소한 향의 액체가 두통약이라니. 괜히 저도 머리가 아프다며 꾀병을 부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성년에게 커피는 허락되지 않던 음료, 대신 게보린 반 알만 주어졌을 뿐이었죠. 모든 것이 풍요로웠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 호기심과 욕망을 절제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도전입니다. 몰래 서랍에서 스틱 하나를 꺼내 가루 상태의 커피를 침에 녹여 먹다 카라멜처럼 끈적해진 흔적을 지우려 입술과 손을 핥던 모습은 마치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알몸이 부끄러워 허겁지겁 숨던 최초의 인간의 모습 같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이것이 제 인생 첫 번째 커피였을 겁니다.
2.
고속도로 휴게소를 들를 때마다 느끼는 재밌는 풍경 중 하나는 저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알록달록한 상의에 무릎이 나온 츄리닝 바지와 슬리퍼 차림에도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죠. 어째서 저는 이 풍경에 호기심을 느꼈을까요? 아마도 커피를 패션의 범주에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추운 겨울, 종이컵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보고서 ‘여전히 넌 커피를 즐겨 마시는구나’라며 헤어진 그녀에게 말을 건넨 그는, 사실 그녀의 컵 속에 든 음료가 오뎅국물인 줄도 모른 채 제멋대로 옛 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환해버린 이야기. 커피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에스프레소를 즐긴다고 대답하던 이와 수줍게 맥심을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의 어떤 우월감과 다른 온도의 쎄함과 쿨함. 먹고 마신 것들에 대한 행위를 얼마나 우아하게 즐겼는지 자신의 기호를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카페인 함유량은 같으나 어쩌면 다른 음료를 마시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개화기 시절 가배라고 부르던 그것과 휴게소 커피 사이의 간극은 이제 너무 멀어져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할 것 같네요.
3.
짐 자무시의 영화 <커피와 담배>를 극장에서 보기 위해 굳이 전주까지 내려간 스물두 살의 저와, 영화를 보는 내내 졸아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지금의 제가, 공통점이라면 여전히 음악을 하고 있고 또 커피를 즐겨 마시고 있다는 점. 그사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중요한 어떤 순간마다 커피를 마셨을 테니 만약 커피의 신이 있다면 제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지 않을까요. 그 독한 술에도 천사들의 몫이 있고, 신의 물방울이라 일컫는 음료도 있는데 커피라고 신화 같은 이야기가 없을 리 만무하잖아요. 커피 맛을 위해 온갖 과학의 방법이 동원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비과학의 언어로 쓴 신비한 이야기에 더 흥미를 느끼지 않던가요. 그래서 죽기 전에 반드시 맛보아야 한다는 극락 커피처럼 마시는 행위에 의식을 담아 기도하듯 오늘도 목 넘깁니다. 커피의 신이시여, 현대인을 보호하소서.
에필로그
어제도 오늘도 밥을 먹었습니다, 처럼 하나마나 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늘 커피를 마십니다. 강원도 골짜기에서 태어난 제가 어쩌다 저멀리 이국의 열매를 갈아 뜨거운 물을 부어 내려 마시는 이 행위를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걸까요? 플룻을 연주할 때나 친구를 만날 때, 하루를 시작할 때조차 늘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이젠 너무나 익숙한 일이라 언제가 시작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졌지만 기억을 더듬어 제 삶에서의 커피 이야기 몇 가지를 써봤습니다.
이동열, 음악가
트럼펫 연주자이자 아마추어 플룻 연주자. 밴드 ‘캐비넷 싱얼롱즈’를 시작으로 아티스트 프루프와 AP SHOP LIVE을 기획/운영했으며, 팩토리에서 열린 전시와 연주 앨범 ‘아일랜드/ island’를 발표했습니다. 현재는 고대 쾌락주의자들의 하루처럼 소리를 탐구하고 음악의 즐거움만 좇으며 플룻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매월 ‘Twleve Sounds Project’라는 이름으로 음원을 발표하고 있으며, 레슨과 음악의 사물을 제작하는 ‘트웰브 사운즈’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도 종종 <가장사적인커피이야기> 시리즈로 찾아올게요. 첫 시간이라 독자님의 소감이 특히 더 궁금해지네요. 커피 이야기가 궁금한 분이 있다면 (분야 무관!) 추천 환영이고요. 물론 독자님의 이야기도 환영입니다.